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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말말

[소설]죽음 - 베르나르 베르베르

배고픈 돈까스 2019. 10. 26. 14:28

2019.10.25. 

 

베르나르 베르베르 - 죽음,  열린책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다. "죽음"이라는 소설로 올해 집필된 책이다. 죽음은 추리소설인데 정말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소설은 항상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고 배웠다. "죽음"에서는 과연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인간이며 언젠가는 죽지 않는가. 죽음이라는 소재는 항상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해 주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때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도 또는 두려운 것이 되기도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죽음에 관한 자신의 가치관을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생하는 것,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줄거리

 

 가브리엘 웰즈라는 작가가 나온다. 가브리엘 웰즈는 처음에 소설을 어떻게 시작할지 정하다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독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죽음에 관해 조사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물론, 가브리엘 웰즈를 죽인 범인은 존재한다.^^

 

 

가브리엘 웰즈 = 작가 자신?

 

 가브리엘 웰즈가 작가 자신과 정말 많이 닮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나온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아침 4시간씩 글을 쓴다고 한다. 몇 년간 그렇게 해왔고 항상 상상력이 넘치기에 소재가 부족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표현에 따르면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듯이 소재가 넘친다고 말한다.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같이 매일 아침 4시간씩 글을 쓴다.

 

 제1권 p.223 「벌이 꿀을 만드는 게 일이듯 저한테는 글을 쓰는 게 일이죠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들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그냥 자신들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고등학생 때, 수학 선생님이 공부는 그냥 하는 거야. 그냥 쭉 하는 거야.라고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나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될까? 내가 매일매일 4시간씩 하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다. 더 고민해봐야겠다. 

 

 

생각이 상반되는 소설 속 인물.

 

 어릴 적 에디슨의 발명이나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에 관해서는 많이 읽어봤을 것이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하지 못한 네크로폰을 가브리엘 웰즈의 형이 완성한다. 토마 웰즈는 가브리엘 웰즈와는 달리 아주 이성적인 합리주의자로 나오고 가브리엘 웰즈는 많은 상상력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작가인 코난 도일과 마술사인 후디니는 서로 정말 잘 맞았지만 코난 도일은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심령술을 믿었고 후디니는 전혀 믿지 않았다.

무아지( <공식> 문학 )와 가브리엘 웰즈 ( 상상력 문학 )가 대립한다. 둘의 대립은 상상력보다 문체를 중시하는  로트 브리예와 무리들( <공식> 문학 군대 )과 문체보다는 상상력을 중시하는 코난 도일 ( 상상력 문학 군대 )가 전투하는 장면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소설 자체에서도 중간중간에 과학법칙이 나오고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마지막을 보면 화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양립하게 된다. 과학법칙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있다.

 

 항상 어떤 생각을 할 때 두 가지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본능적으로 편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양립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많다고 새삼 느끼고 있는 2019년이다.

 

 칸트도 상상력을 이야기했는데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상계의 정보가 지식이 된다고 했다. 칸트의 상상력과 소설 속 상상력이 같은 것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상상력이 이성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처음 보는 형식

 

 처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베르베르의 소설에서는 색다른 형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지루할 법도 하지만, 책 사이사이에 과학 법칙이나 근거를 설명해준다. 중간에 설명해준 모든 법칙들이 소설 속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등장하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마치 원래는 각주에 들어갔어야 했던 내용이 소설 속으로 나와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자연계열 인문계열이 나눠진 게 아니라 이과적 요소가 충분히 있는 소설로 보인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에 작가들이 나와서 문체와 상상력에 관해 대립하면서 싸울 때, 소설의 주인공이 나와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 귀엽다. 다른 작가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나와서 싸우는 것처럼 베르베르는 우리의 상상을 자극할 수 있도록 많은 요소들을 던져주고 있다.

 

 "죽음"에서는 장마다 제목이 없고 숫자로 묘사한다. 누구의 이야기가 나올 것인가 제목으로 전혀 예상할 수 없고 내용만으로 예상하는 것도 소설을 읽으면서 나를 흥미롭게 해주는 요소였다. 소설 내용에서 등장인물의 말이 따옴표("")가 아니라 (「」)으로 표기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글을 쓸 때, 접속사가 최대한 없으면 좋고 읽기 편하게 되어 있으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가브리엘 웰즈의 형(토마, 토마 웰즈 등)이라는 표현이 정말 다양하게 나온다. 가끔 집중을 잃을 수도 있는 순간에도 자꾸 바뀌며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들이 나를 잡아줬다.

 

<궁금증>

 

1.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과학자들이 자기 자신이 상상한 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다고 믿는다. 크게 3가지로 정리한다. 웰즈는 소설에서 각종 감염과 암을 예방하기 위해 벌거숭이 두더지쥐를, 손상된 장기의 이식을 위해 아홀로틀을, 노화를 막기 위해 갈라파고스 거북이를 연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플라나리아는 왜 나오지 않을까? 아마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과 기억이 어디에 있는지는 관련이 없어서 그런 듯하다. (플라나리아는 제1권 141페이지에서 "기쁨과 고통의 기억이 뇌 속에 있는 게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해 준다.)

 

2. 가브리엘 웰즈와 이냐스 웰즈는 정말 많은 농담을 한다. 조금은 선정적이기도 하지만 읽어보면 막 엄청 웃기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농담을 좋아할까? 프랑스에서는 이런 농담이 먹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냐스의 농담 중 하나>

3. AI도 결국은 웰즈의 소설을 작성하지 못한다. 문체는 아름답지만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할까? 상상력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4. 소설에서 코난 도일이 정말 많이 나온다. 가브리엘 웰즈와 베르베르는 코난 도일을 좋아한 것 아닐까.


<말말말>

 

제1권 p.225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는 없어. 우린 플로리스트 같은 사람들이야, 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 꽃 저 꽃 모아 멋진 꽃다발을 만들지

(무에서 무를 창조하는 학문이라도 딱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한 곳에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1권 p.227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제2권 p.9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 재능이 생명 전반에 유익하게 쓰이도록, 특히 살아 있는 제 인간 동족들의 의식 고양에 기여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

 

제2권 p.42 <타이타닉은 공부를 한 엔지니어들이 건조했지만 노아의 방주는 독학자가 만들었지요. 그런데 뭐가 침몰하고 뭐가 대홍수를 견뎠는지는 모두가 잘 알죠.>

(이런 표현은 어떻게 떠오를까..)

 

제2권 p.47 <뤼시의 전 애인이 제대로 농락당한 것 같구나.>

(소설 속에서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돈을 지불했지만 결국은 사기였다는 것을 소설 밖에서 보는데 현실에도 이런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제2권 p.313 <나는 왜 죽었지?>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질문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왜 죽었지라는 의문이 있기 전에 나는 왜 태어났는지에 관한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 같다. 생물학적인 답변이 아니라 철학적인 답변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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